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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의 음식예찬 (6)

투르게네프 소설에선 왜 음식과 정겨운 식사 장면이 없을까?

소설 <아버지와 아들> 식사 장면을 통해 본 러시아 사회상

석영중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  편집 김혜인 기자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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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I. S. Turgenev, 1818~1883)는 러시아 작가들 중 가장 우아한 신사다. 전통적인 러시아 귀족 계급에 속하며 시골에 드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고,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유럽을 자주 여행했고, 유럽의 지성파 인물들과 교유를 했고 프랑스 여가수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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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제대로 품격을 갖춘 러시아 신사였다. 그의 글 또한 귀족적이었다. 적당한 깊이의 심리 묘사로 서구 독자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와 달랐다. ‘러시아 사람답지 않게’ 너무 잘 다듬어져 있었던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매우 수준 높은 식도락가였다. 교양 높은 미식가로서 러시아 요리와 프랑스 요리의 가치를 섬세하게 비교 평가할 수 있는 미각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코즈모폴리턴’으로서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 음식에도 정통할 뿐 아니라 러시아 지주로서 푸짐한 ‘러시아식 식사’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의 소설에서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없다. 식사의 ‘상황’은 있되 음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의 글처럼 요리 종류와 음식 이름, 먹는 태도, 분위기 등의 자세한 언급은 없으며 단지 아침, 점심, 저녁 식사의 상황만 기술돼 있다. 

이에 대해 한 평론가는 그 이유를 ‘러시아 지주계급의 와해’로 들었다. 전통적으로 식사나 차 마시기는 가족, 친지들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소통하는 자리를 의미했는데 19세기 이후 계급-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이런 공간이 와해되고 있음을 투르게네프가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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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의 부재’는 투르게네프의 걸작 <아버지와 아들>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기성세대(아버지 세대)와 신세대(아들 세대)의 대립을 통해 19세기 중엽 러시아 사회를 들끓게 했던 이념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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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대학을 막 마친 아들(아르카디)이 친구(바자로프)를 데리고 아버지(니콜라이) 영지로 돌아 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버지 세대를 대표하는 니콜라이는 적당히 보수적이고 점진적 개혁주의자이다. 반면 아들과 친구는 당시 러시아 사회에 등장한 급진적 니힐리스트 세대로서 기성세대 모든 것을 부정하며 오로지 자연과학만을 신봉한다. 

이들의 세대 갈등 테마는 식사의 ‘상황’에서 잘 묘사돼 있다. 이들은 식사를 하면서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모두들 흩어졌다. 과거 오순도순 전통적 식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식사 상황 묘사는 다음과 같이 너무도 간단명료하게 언급된다. 담소에 대한 언급도 없다.

“식사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모두들 저녁을 배불리 먹고 다른 때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흩어져 잠자리에 들었다."

“손님들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 곧 출발했다"

“식사는 급히 서둘러 준비된 것이었는데도 제법 훌륭하고 푸짐했다. 그러나 술만큼은 별로 신통하지 못했다."

그나마 가장 자세하게 묘사되는 식사는 아들과 친구를 위해 차려진 식사인데 여기서도 식사 고유의 정겨움이나 소통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간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을 말해주는 소설이다. 여기서 식사 상황이 좋은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다. 

서구파와 슬라브파 중 누가 옳고 그른가를 말하는 소설도 아니고, 누가 선하고 악한가를 말하는 소설도 아니다. 다만 러시아 사회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에서 음식은 ‘이념적’ 뉘앙스를 내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식의 부재, 정겨운 식사 장면의 부재는 그 어떤 이념적 진술보다도 신랄하게 당시 사회의 갈등 양상을 보여준다. 

어쩌면 21세기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좌우 대립, 보수 대 진보의 갈등도 이와 비슷한 모습 아닌가. 


 ※ 출처: 석영중 교수 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 2013)’

글ㅣ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며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연의 연구, 교수 활동은 물론 강연, 집필,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고 제 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석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 교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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