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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사형수, 그들의 마지막 모습

변하지 않은 북한...그 시대적 아픔

좌익수의 죽음은 우리의 역사적-민족적-시대적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일그러진 우리 한반도 분단의 현대사, 그 가슴 저미는 불행한 동족간의 첨예한 대립, 원한, 갈등, 불신, 그 비극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냉전의 현장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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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이 확정됐다가 1984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 때 무기징역으로 감형돼 1991년 당시 복역중이던 손유형은 교화의원 박삼중 스님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시 좌익수는 광복절 전후에 처형된다는 소문이 나돌 때였습니다. 저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고 이왕 가는 바에야 부끄럽지 않게 가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낯모르는 교도관이 와서 ‘가자’는 것이었어요. 그것은 곧 저에게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정신이 아득해진 저는 순간적으로 벽에 몸을 갖다 붙인 채 ‘죽어도 못나가겠다’고 버텼습니다. 평소 의연하게 가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말입니다. 가슴과 머리가 엉망진창인 와중에서도 ‘이래 봐야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놀더군요. 그러자 그 교도관은 ‘아니다, 좋은 일이다’고 하더군요.
저는 ‘너희들은 죽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한다’고 버텼습니다. 그런데 제 담당 교도관도 환하게 웃으면서 ‘좋은 일이니 잠자코 따라나오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들며 ‘설마 이 사람이 웃으면서까지 속이지야 않겠지’하고 따라나섰습니다. 어느 방엔가 들어갔는데 거기서 저는 감형명령서 낭독을 들었습니다. 그때의 그 환희! 나머지 소리는 웅웅하며, 내 귀엔 오로지 살려준다는 소리만 들렸죠."
좌익수나 양심범은 확심범이라 대체로 의연하게 최후를 마친다고 한다. 1950~60년대 처형된 좌익수에는 공비, 무장간첩, 행동대원들이 많아 집행장에서 “김일성 만세" 등을 고래고래 외치다 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1970년대 이후 대부분 인텔리 출신의 이른바 자생간첩, 해외교포간첩들이 처형되면서는 마지막 소리가 대개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내용이었다고 했다.
1976년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어느 여자 간첩은 “내가 활동한 것은 김일성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직 조국통일을 위해서였는데 못보고 가는 것이 한"이라며 벌떡 일어나 “조국통일 만세"를 외쳤다.
놀란 교도관들은 서둘러 두건을 씌우고 반항하는 여자를 주먹으로 때려 반항을 못하게 한 뒤 처형했다고 한다. 지금 돌이켜보면 마음이 매우 아픈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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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종교에 귀의한 채 처형된 남파간첩 김세진은 집행장에서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일시나마 무신론에 빠져 기계적인 인간관을 갖게 된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죽은 다음에 영혼을 위로하는 천도제를 지내줬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좌익수의 죽음은 우리의 역사적-민족적-시대적 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일그러진 우리 한반도 분단의 현대사, 그 가슴 저미는 불행한 동족간의 첨예한 대립, 원한, 갈등, 불신, 그 비극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을 뿐 아니라,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냉전의 현장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가슴이 더 아픈 것은 마지막까지 “나는 간첩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처형된 사람들의 얘기다. 우리의 억압적 정치구조에서 빚어진 이른바 용공조작의 산 케이스일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진실을 숨기고 간 음흉한 ‘빨갱이’들의 모습일까.
1986년 5월 서울구치소에서 처형된 최을호(당시 63세)는 유언에서 “삼촌이 이북에 있다가 넘어와 용돈을 줘 멋모르고 썼으며, 어디 가라고 해서 갔을 뿐이다. 그것이 실수라면 실수고, 죄라면 삼촌 잘못 둔 것밖에 없다. 간첩 누명을 쓰고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혀 죽는 게 너무 억울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역시 같은 날 처형된 재일동포간첩단의 김영희(30)는 “가난이 죄"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죽음을 미리 예감한 케이스에 속한다. 사형 당일 아침 의무관을 찾았다.
“몸이 찌뿌듯하고 안좋아요, 어제 밤 잠자리도 어찌나 뒤숭숭한지…"
의사는 몸살끼가 있다며 감기약 대신 진정제를 주었다. 그녀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서독 광부로 취업 중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북한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위장귀순한 혐의로 사형이 집행된 김진모(47)는 “나는 억울하다… 그러나 88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위정자가 정치를 잘해 주길 바란다"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갔다고 한다.
1985년 대대적으로 발표됐던 해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6공 출범 후 무기로 감형된 김성만(34, 연세대 졸)은 담당 교화 목사에게 하루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제가 무슨 간첩입니까. 목사님도 한번 끌려 들어가면 간첩이 됩니다."
죽산 조봉암(독립운동가, 농림부장관, 국회의원, 국회부의장, 대통령후보)은 자유당 시절 진보당 사건으로 간첩으로 몰려 1959년 7월31일 처형됐다. 그의 의연했던 마지막 모습과 한마디가 서울구치소에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 가족이 다 잘 알아서 하겠으니 별 말이야 있겠소. 결국 이승만에게 져서 이렇게 된 것인데…. 다만 한마디 남겨놓고 싶은 게 있소. 이 나라에서 정치투쟁을 하다가 지면 이렇게 될 줄 짐작 못한 바 아니나…그 희생으로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라오."  
사형수들의 의식 한 구석에는 처형 직전까지도 ‘혹시나’하는 기대감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만약 이 순간에도, 만에 하나라도, 사형집행을 갑자기 정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면 하는 기대감 말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엡스키는 반역죄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황제의 명에 의해 감형돼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케이스다. 그는 그때 심정을 “그 삶의 환희는 아마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했으며 그 드라마틱한 인생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들에 재탄생됐다.
앞서 언급한 해외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로 감형됐던 김성만은 1990년 1월 자신의 교화요원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저는 세 번 재판받았고 사형선고를 세 번 받아 보았습니다. 사형이 확정되자, 저의 인생은 끝이 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민중자주와 민중경제를 추구하는 일도 하다가 말았고, 가족도 제가 죽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 세상에 얼마 동안은 더 살고 싶었는데 죽어야 하니 저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했고 이불을 개는 손에도 힘이 없었습니다.
운동시간에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하다가 홀로 있고 싶어서 빈 방으로 들어가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우울한 기분을 가눌 길 없었고 어쩌면 눈물이 나올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충격이 그다지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며칠간 우울함 속에 잠겨 있었지만 사회변혁 운동가로서의 기개는 죽음의 충격이 삶의 리듬을 파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제 기억으로 세 번의 사형선고 그 어는 것도 저의 고요한 잠을 방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밥그릇을 비우는 것도 사형선고와는 무관하였습니다. 식욕도 정신력이라서 5공화국 정권이 저에게서 밥과 반찬을 빼앗아 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충격은 달랐습니다. 저의 실핏줄까지 가득 채워진 환희는 식욕의 감각마저 마비시켰습니다. 끼니를 굶었어도 방금 밥을 먹은 것 마냥 뱃속이 든든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차분한 마음을 되찾을 수 없었던 저는 밤에 잠도 또한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잠깐 눈이 감겼는가 싶으면 곧 다시 떠지고 또렷한 정신은 도무지 졸립지가 않았습니다. 잠은 자자. 자야할 시간에 푹 잘 자자. 사형선고를 받고 나서도 잠을 잘 잤듯이 지금도 차분한 마음으로 자자.…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잠은 안오고 도리어 정신은 더 또렷해졌습니다. 저는 동이 터 올 무렵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절망적인 충격은 사람의 굳센 의지로 고삐를 잡아채고 다스릴 수 있지만 죽은 것으로 치부한 자신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환희의 충격은 그 정도가 너무나도 강렬해서 사람의 이성이나 의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충격은 죽음의 충격보다 몇배나 더 강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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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1980년대 이전 우리나라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동서 냉전이 첨예한 상황에서 우리는 북한, 소련, 중국 공산주의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고,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반도가 공산주의세력에게 적화되는 등 격동의 시대였다.
우리로선 자유진영에 속한 조국을 지켜내야 했고 이에 따라 공산주의 세력의 내부 침투를 막아야했다. 더구나 우린 1950년 북한 기습남침에 의해 엄청난 희생의 쓰라린 기억이 있었다. 북한의 경제력이나 국력도 그때는 우리보다 나아 여러 모로 우리는 열세에 처한 상태에서 방어를 해야 했다.
그런 역사적 맥락에서 국가보안법에 의한 좌익세력 척결은 시대적으로 불가피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지나치거나 가혹한, 그리고 자의적인 법해석이 일부 있었으며 그로 인해 억울한 죽음도 있었다.
어쩌면 모두 억울한 죽음일 수 있었겠다.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갈리고 이념전쟁을 치르지 않았다면 애초 사법적 제재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것들이니....
그러나 지금도 북한은 변한 것이 없다. 우리를 협박하고 무력으로 어찌해보겠다고 윽박지른다. 지금도 북한의 내부 와해공작에 대한 대비는 절실하다.
만약 우리가 북한과 관련된 한국 공권력을 문제 삼는다면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한국과 관련, 북한이 행한 공권력의 문제도 함께 짚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 한국의 인권을 문제 삼는다면, 북한의 인권도 똑같이 문제 삼아야 한다. 그게 싫다면 당분간 우리는 시대의 아픔, 분담의 아픔이란 차원에서 서로의 예민한 문제에 대해서는 자제하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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