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 (4)

음식에서도 이념대결…‘러시아 국수’ 대 ‘마카로니’

칼국수와 비슷한 러시아국수, 고급레스토랑선 안 팔아

석영중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  편집 김혜인 기자  2020-01-03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남의 것’과 ‘나의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시각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슬라브파’ ‘서구파’라는 사상적인 이름으로 구체화된다.

‘슬라브파’란 러시아의 모든 문제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에서 비롯된 것으로 러시아의 구원은 개혁 이전의 오염되지 않은 상태로 돌아감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지식인 그룹을 말한다. 

반면 ‘서구파’는 러시아는 유럽의 일부이므로 서구의 물질문명과 정신문화 모든 것을 하루라도 빨리 받아들여 학습해야만 낙후성에서 벗어나 진보를 향한 유럽의 행진 대열에 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룹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19세기초 음식의 어휘로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해왔다는 점이다. 요컨대 ‘나의 것’은 러시아 국수요, ‘남의 것’은 마카로니로 표현됐다. 

shutterstock_762444244.jpg
마카로니

러시아는 수백년전 몽골 지배를 받을 때 국수가 전해져 수프의 형태로 먹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러시아어로 국수와 국수 요리는 모두 ‘라프샤(lapsha)'로 표기된다. 

한편 표트르 개혁 이후 이탈리아 국수인 마카로니가 유입됐다. 당시에는 이탈리아 면류 일반을 가리키는 파스타 대신 마카로니라는 단어를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식단에서, 그리고 러시아 문화에서 ‘러시아 국수’와 ‘마카로니’는 엄격히 구분됐다. 우선 러시아 국수는 고급 레스토랑 메뉴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싸구려 음식점, 역참, 시골 여인숙에 딸린 식당 등지에서 볼 수 있었다. 

러시아 국수는 주로 닭고기 육수에 삶아졌는데 가끔 당근이나 감자 썬 것을 넣어 함께 끓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칼국수와 비슷하지만 국물이 조금 더 껄쭉한 음식을 상상하면 된다. 

반면 마카로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조리되었는데 반드시 파르메산 치즈나 모차렐라 치즈가 곁들여 올려졌다. 

그러므로 순수하게 요리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국수’는 러시아적인 것, 시골풍의 것, 값싼 것, 촌스러운 것을 의미했고 마카로니는 외국의 것, 비싼 것, 고급스러운 것을 의미했다. 

ru.JPG
러시아 국수 / 출처 구글

이 국수와 마카로니는 요리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19세기초  러시아인들의 정신 영역으로 들어가 ‘러시아국수파(lapshichniki)'와 ’마카로니파(makaronniki)'라는 용어를 합성해 냈다.

러시아국수파는 문자 그대로 러시아 관습과 문화 전통을 옹호하는 사람들이고, 마카로니파는 서구적인 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슬라브파’와 ‘서구파’의 전신인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푸슈킨은 국수를 넣어 끓인 러시아 수프를 좋아했지만 작품 속에서는 단 한 번도 러시아 국수나 국수 요리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대신 “파르메산 치즈를 곁들인 이탈리아식 마카로니"는 자주 소개됐다. 그는 소박한 러시아 음식을 좋아하는 한편 교양 있는 코즈모폴리턴이기도 했다. 

아무튼 마카로니와 러시아 국수로 표현된 사상적 대립은 19세기 내내 지속됐다. “자국의 것 대(對) 외국의 것, 러시아적인 것 대(對) 서구적인 것 간의 갈등, 슬라브파 대(對) 서구파의 갈등", 즉 ‘미식의 변증법’은 19세기 내내 러시아 문화와 문학에 살아 있었다.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은 물론 고골의 <죽은 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기록돼 있다. <계속>

 ※ 출처: 석영중 교수 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 2013)’

글ㅣ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며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연의 연구, 교수 활동은 물론 강연, 집필,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고 제 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석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 교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 다수가 있다.
더보기
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 (4)
‘카라마조프가의 형제’가 말하는 진정한 금욕 “고상한 이념 떠들지 말라”
‘대문호’ 도스토엡스키의 식사는? 장어요리, 싸구려 백포도주 한잔...
파리 최고급 식당에 빠졌던 톨스토이의 변신 미식·대식 ·탐식이 그에겐 왜 악인가
불륜 현장에 등장하는 수박과 철갑상어 체호프 단편의 음식코드
노부부의 '먹고 마시는 삶'을 통한 풍자 고골의 <옛 기질의 지주>
'먹방'이 대세인 세상, 200년전도 그랬네 연극 <검찰관>, 19세기 러시아 신랄하게 풍자
러시아 문호 고골이 굶주림으로 숨진 이유 "내 뱃 속에 악마가 있다"
배터지게 먹는 러시아 식문화, 다 이유 있었네 1년 2백일 넘게 오직 채식...나머지는 폭식
모든 프랑스적인 것을 '부도덕'하다며 싫어한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레스토랑 장면
투르게네프 소설에선 왜 음식과 정겨운 식사 장면이 없을까? 소설 <아버지와 아들> 식사 장면을 통해 본 러시아 사회상
“삼시세끼 잘먹고 식간에는 차, 과일, 간식, 하바나산 시가, 그리고 자는 것” 나태한 귀족 오블로모프가 꿈꾸는 ‘이상적 삶’
음식에서도 이념대결…‘러시아 국수’ 대 ‘마카로니’ 칼국수와 비슷한 러시아국수, 고급레스토랑선 안 팔아
19C 러시아 귀족들, 프랑스어로 말하며 프랑스음식 먹어 푸슈킨 문학의 요리이름도 러·영·불어 혼용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슈킨의 식도락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것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
러 표트르대제가 바꾼 음식문화 서양 ‘코스요리’의 기원이 러시아인 줄 아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