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닷컴
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 (5)

“삼시세끼 잘먹고 식간에는 차, 과일, 간식, 하바나산 시가, 그리고 자는 것”

나태한 귀족 오블로모프가 꿈꾸는 ‘이상적 삶’

석영중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  편집 김혜인 기자  2020-01-10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shutterstock_1573554829.jpg

가난한 시절, 우리에게 밥이 가장 중요했듯이 러시아인들에게도 빵이 가장 중요했다.

우리 속담에 “밥이 보약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에겐 “빵은 모든 음식의 아버지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관 속에 빵도 같이 넣었다. 망자의 영혼이 천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준다는 믿음에서였다. 

러시아인들에게 빵(khleb)은 통밀과 호밀을 섞어 만든 ‘검은 빵’을 의미한다. 18세기 표트르 대제 개혁-개방 조치 이후 유럽에서 들어온 ‘흰 빵’은 엄밀히 말해서 빵이 아니었다. 프랑스어의 ‘boule'을 음차하여 “불카(bulka)"라고 별도로 불렸다.

빵과 관련된 속담에서도 빵은 오로지 러시아식 검은 빵만을 가리켰다. 외국에서 들어온 ‘흰 빵은 물리지만 검은 빵은 결코 물리지 않는다“ 같은 속담에만 등장할 뿐이다.

러시아 작가들은 대체로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앞서 살펴보았던 푸슈킨 뿐 아니라 저 유명한 고골, 톨스토이, 체호프는 모두 현실 속에서나 작품 속에서나 먹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보다 덜 알려졌지만 러시아 문학사에서 위대한 리얼리즘 작가로 존경받는 곤차로프(I. A. Goncharov, 1812~1891) 역시 유명한 식도락가였다. 그의 대표작 『오블로모프(Oblomov, 1859)』는 러시아 요리의 백과사전이라 할 만큼 온갖 요리들로 가득차 있어 외국인 독자가 그것을 제대로 읽으려면 별도의 요리 사전이 필요할 정도였다.

『오블로모프』는 19세기 중엽 농노 제도하의 러시아 현실을, 한 귀족 지식의 무기력한 삶을 통해 보여주는 소설이다. 

선량하고 순수한 주인공 오블로모프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잠시 관직에 머물지만 적성에 안맞아 조기 퇴직하고 고향 시골 영지로 내려와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일생을 보낸다.

shutterstock_244572490.jpg

그에게 중요한 일은 딱 두 가지, 즉 먹는 것과 자는 것이다.

그는 하루 세끼 하인이 차려주는 음식을 달게 먹고, 식간(食間)에는 간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거나 하바나산 시가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아주 편안한 실내복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자거나 비스듬히 기대어 졸거나 공상을 한다. 

그에게는 욕망도 없고 열정도 없고 의욕도 없다. 무언가를 이룩한다거나 바꾼다고 하는 것은 그로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최고다.

그에게 ‘이상적인 삶’은 이렇다. 아침에 천천히 일어나 산책을 하고 아침을 먹고 온실에 들어가서는 익어가는 복숭아, 포도, 수박을 관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 그 시간에 부엌에서는 음식 끓는 냄새가 진동을 하지. 눈처럼 앞치마를 두른 요리사가 모자를 쓰고서 부산을 떨고 있어. 냄비 하나를 휘휘 젓다가 금방 저쪽으로 가서 반죽을 굴리고 물을 쏟아 붓고……칼질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고……야채를 잘게 썰고……아이스크림을 돌리고…

그 다음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찻주전자와 후식거리를 실은 수레를 자작나무 숲으로 보내는 거야. 그냥 들판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풀밭으로 말이지. 건초 더미 사이에 양탄자를 깔고 거기서 수프와 비프스테이크를 맘껏 즐기는 거지…

이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집 안에 벌써 환하게 등불이 밝혀지고 부엌에서는 다섯 개의 칼질 소리가 요란하다네. 버섯이 담긴 프라이팬, 커틀릿, 딸기…"

                                 - 소설 『오블로모프』 중에서

 



19세기 중엽 러시아 사회에서 이런 ‘오블로모프 기질(oblomovshchina)'은 특별한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 게으름, 나태, 무위, 무기력과 동의어라 볼 수 있는 이 기질은 제정러시아 사회, 특히 전제정치, 농노제도 같은 낙후성을 보여주는 사회적 상징이었다. 

러시아내 서구파의 시각에서 볼 때 오블로모프의 음식 사랑은 그 자체가 악(惡)이자 기생충 같은 러시아 귀족 계급의 상징이었다.

shutterstock_570337246.jpg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음식 사랑을 “식도락적인", “슬라브주의"라 부르며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맛있는 음식들은, 주인공의, 그리고 러시아라고 하는 한 국가의 잃어버린 어린 시절, 그 풍요롭고 순진하고 행복했던 과거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식사를 했던 추억을 사랑하면서 음식은 나눔, 사랑, 형제애, 소통 같은 긍정적 관념의 표상이었으며, 슬라브파 지식인들은 표트르 대제 개혁 이전의 순박한 러시아와 그 공동체 의식에서 러시아의 구원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나아가 작가 곤차로프는 이런 오블로모프의 삶에 보다 긍정적 시선을 던지고 있다.

오블로모프는 게으르고 한심한 데도 어쩐지 미워하기 어렵다. 덩치가 아주 큰 귀엽고 순진한 소년 같은 면이 있어서 그런지, 항상 무언가 도모하며 부지런히 왔다 갔다하는 ‘서구파 지식인’ 유형보다 더 인간적인 매력이 있으며 친근감이 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구파 진영의 ‘역동적인 ’삶‘, ’목표지향적인 삶‘에는 철학이 없다는 사실이다. 게을러빠진 귀족 도련님 오블로모프도 알 것은 다 안다. 그는 늘 바지런을 떠는 ’서구파 지식인‘의 전형 슈톨츠에게 묻는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평생 동안 자기 스스로를 괴롭혀야 하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쁘게 사느냐?. 이 철학적 질문에 슈톨츠의 대답은 놀랍도록 빈곤하다. 

“그저……노동 그 자체를 위해서지"


 ※ 출처: 석영중 교수 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 2013)’

글ㅣ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며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연의 연구, 교수 활동은 물론 강연, 집필,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고 제 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석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 교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 다수가 있다.
더보기
석영중 교수의 음식예찬 (5)
‘카라마조프가의 형제’가 말하는 진정한 금욕 “고상한 이념 떠들지 말라”
‘대문호’ 도스토엡스키의 식사는? 장어요리, 싸구려 백포도주 한잔...
파리 최고급 식당에 빠졌던 톨스토이의 변신 미식·대식 ·탐식이 그에겐 왜 악인가
불륜 현장에 등장하는 수박과 철갑상어 체호프 단편의 음식코드
노부부의 '먹고 마시는 삶'을 통한 풍자 고골의 <옛 기질의 지주>
'먹방'이 대세인 세상, 200년전도 그랬네 연극 <검찰관>, 19세기 러시아 신랄하게 풍자
러시아 문호 고골이 굶주림으로 숨진 이유 "내 뱃 속에 악마가 있다"
배터지게 먹는 러시아 식문화, 다 이유 있었네 1년 2백일 넘게 오직 채식...나머지는 폭식
모든 프랑스적인 것을 '부도덕'하다며 싫어한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레스토랑 장면
투르게네프 소설에선 왜 음식과 정겨운 식사 장면이 없을까? 소설 <아버지와 아들> 식사 장면을 통해 본 러시아 사회상
“삼시세끼 잘먹고 식간에는 차, 과일, 간식, 하바나산 시가, 그리고 자는 것” 나태한 귀족 오블로모프가 꿈꾸는 ‘이상적 삶’
음식에서도 이념대결…‘러시아 국수’ 대 ‘마카로니’ 칼국수와 비슷한 러시아국수, 고급레스토랑선 안 팔아
19C 러시아 귀족들, 프랑스어로 말하며 프랑스음식 먹어 푸슈킨 문학의 요리이름도 러·영·불어 혼용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푸슈킨의 식도락 “점심에 먹을 수 있는 것을 저녁까지 미루지 말라”
러 표트르대제가 바꾼 음식문화 서양 ‘코스요리’의 기원이 러시아인 줄 아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