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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의 음식 예찬 (8)

배터지게 먹는 러시아 식문화, 다 이유 있었네

1년 2백일 넘게 오직 채식...나머지는 폭식

석영중 고려대 중앙도서관장  |  편집 김혜인 기자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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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의 음식은 그들의 종교인 정교(Orthodox Christianity) 신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러시아는 988년에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정교신앙을 받아들였는데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약 9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러시아 국교였다. 일종의 민족신앙이다. 

원래 토속신앙을 지녔던 고대 러시아가 정교 국가로 거듭남에 따라 음식에 대한 이중적 관념이 러시아 민족성에 뿌리를 내렸다.

러시아인들은 원래가 먹고 마시는 것을 즐기는 민족이었다. 때문에 정교를 받아들이면서 종교적 극기(克己)를 고수하려기보다는 ‘먹는 즐거움’과 ‘마시는 즐거움’을 이웃과 나누는 것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절제와 러시아적인 식욕이 서로 어우러져 독특한 러시아적 식문화가 탄생했다. 

정교는 서구 가톨릭에 비해 덜 교조적이고 덜 금욕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식탐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질타는 언제나 러시아 정신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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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화의 두 축, 즉 ‘pitanie(양육, 음식의 섭취, 육체의 양식)’와 ‘vospitanie(교육, 교양의 섭취, 영혼의 양식)’는 먹기의 즐거움과 정신적 성장간의 대립과 공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영혼의 양식’과 ‘육체의 양식’을 모두 인정한 것이다. 

러시아 정교에서 한 해는 ‘금식(postnyi, fast)' 주간과 ’잔치(skoromnyi, feast)' 주간으로 나뉜다. 금식은 아예 아무것도 안 먹는 지독한 단식에서부터 고기와 달걀, 유제품을 제한하는 금육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가 있는데 무려 연중 약 192일에서 216일이 금식기간에 포함되었다. 

혁명전 러시아 달력에는 각종 축일과 금식 주간이 상세하게 표시되어 있었는데 백성들은 이 달력에 따라 엄격하게 음식을 제한했다. 그러나 그들은 금식기간 중에 기름기를 섭취하게 위해 여러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냈다.

생선과 버섯을 다양하고 맛있게 조리하는 방법, 버터 대신 식용 기름을 사용하는 음식, 빵이나 파이를 만들 때 달걀 대신 편도유를 넣어 반죽을 하고 향을 더하기 위해 장미수를 첨가하는 방법 등등….

또한 금식이 아닌 기간 동안에는 위장에 소위 ‘기름칠’을 하기 위해 거의 미친 사람들처럼 기름진 음식을 먹어 댔으며 심지어 ‘버터 주간’이라는 기간까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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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인들은 버터 주간 동안에는 문자 그대로 버터를 잔뜩 두른 철판에 팬케이크를 지져서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또한 ‘잔치 주간’을 지칭하는 러시아어 ‘스코롬니’는 원래 ‘부정한 음식’을 뜻하는데 사실은 그 기간 중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육고기, 우유, 버터, 달걀 등을 의미했다. 

러시아 정교는 유난히도 물질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한다. 육체를 악으로 보는 근본주의와 반대된다. 그리스도 역시 육신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엄격한 금식의 규칙이 존재했을까.

종교적 관점에서 음식은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회개와 정화의 도구다. 육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정화되려면 일정기간 소식과 채식을 해야 육체를 거룩하게 단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기와 기름기는 정욕을 부채질하므로 정기적으로 금식을 함으로써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 요컨대 금육(禁肉)과 금욕은 같은 차원의 절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튼 일년중 반이 넘는 기간을 금식의 날로 지켜야 했던 러시아인들은 나머지 기간에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위장을 혹사했고 또 위장의 혹사가 끝나면 다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야 했다. 금식과 폭식이 번갈아가며 그들의 식문화를 지배한 것이다.


 ※ 출처: 석영중 교수 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예담, 2013)’ 

글ㅣ 석영중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며 고려대 중앙도서관장을 겸하고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연의 연구, 교수 활동은 물론 강연, 집필, 방송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고 제 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과 한국슬라브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뇌를 훔친 소설가>,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석교수의 청소년을 위한 번역 교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뿌쉬낀 문학작품집>, <분신>, <가난한 사람들>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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