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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즈음에 (8)

퇴사한 나를 못 본 척 외면하는 지인들

서글프지만 그게 인생살이

한강 (필명)  20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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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당발에 속한다. 여러 방면에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 사람들과 만나기 좋아하는 내 성격도 그렇고, 신문기자란 직업적 특성에서도 연유한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학교도 광화문 근처에서 다녔고 이후 직장도 광화문 주변이다. 거의 평생 광화문 주변을 배회하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기자 시절 광화문과 태평로 주변을 걸어가다 보면 아는 사람들을 꼭 만났다. 길거리에서 반갑게 악수하고 인사 나누는 것이 일상화돼 있다.

그러나 신문사를 나온 이후 변화가 생겼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여전히 내가 아는 사람들을 많이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상대방은 나를 못보고 그냥 지나간다. 

과거에는 상대방이 먼저 아는 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내가 아는 척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매정하게 지나가곤 한다.

처음에는 상대방이 나를 못보고 지나가기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워낙 일에 바쁘고 머리가 복잡해 자기 생각에 골몰하면 다른 사람이 잘 의식되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 내가 그랬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하다보니 ‘혹시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의 자격지심에서 나온 오해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로변에서는 못본척하고 지나갈 수 있다. 그러나 좁은 골목길에서는 그럴 수 없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웃 신문사 잘 나가는 후배였다. 그는 멀리서 나를 보더니 다소 곤혹스러워(?) 해 하는 것 같았다. 서로 간격이 좁혀져 얼굴 표정이 파악되는데 그는 참으로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애도’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큰 불행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듯 안타까운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럴 경우 참 할 말이 없다. 상대방이 나를 배려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너무 오버하는 태도에서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다. 

아마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나를 보고도 피하려는 이유도 대략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평상시처럼 대하기도 그렇고, 일부러 유쾌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안됐습니다’라는 식으로 대하자니 오버하는 것 같고…. 에이 이럴 바에 모르는 척 해버리자.

반대로 싸늘한 태도를 그대로 보이는 이도 있다. 냉소적으로, 내가 내미는 손길을 건성으로 받으면서 “아 독립하셨다면서요" 말을 내뱉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고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그의 미소가 ‘너 꼴 좋구나. 한번 잘해봐라. 그렇게 세상 간단치 않을 거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일순 내 마음은 흔들린다. 


‘이 친구 봐라. 내가 회사를 나왔다고 이런 식으로 나를 대해? 나쁜 놈. 네가 내게 이럴 수 있어?’

그럴 때 내 마음 속 다른 목소리는 이렇게 나를 비판한다.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옹졸하게…. 왜 지레짐작해서 남이 너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생각하지? 그런 생각이 바로 너를 지게 만드는 요인이야’

이런 마음 속 공방전은 나를 더욱 힘들고 피곤하게 만든다.

일본 사람들은 대개 예의가 바른 법이다. 기분 나빠도 속내를 나타내지 않는다. 더구나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하면 그걸 가지고 농담의 소재로 삼는 법이 없다. 

그런데 어느 일본 신문 한국특파원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내가 사표를 쓰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게 전화를 해왔다. 그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삐이졌소요?"

“네. 뭐라구요?"

“아니, 한부장, 삐져서 안나오고 사표 냈다면서요?"

“…"


처음에는 그의 어눌한 한국발음으로 무슨 뜻인줄 몰랐다. 두 번째 말귀에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이 격에 맞는 것 같지는 않았다. 농담으로 말했나? 같은 샐러리맨 입장에서 수십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두는 심경은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런 식으로 농담하나?

이 친구는 평소 농담을 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전형적인 일본 사람답게 매사 진지한 편이다. 그런 친구가 내가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있는데 분위기에 어울리지도 않고, 격에도 맞지 않는 ‘농담’을 했다. 어쩌면 그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한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기자적 감각으로는 다음 대화가 중요했다. “힘내세요. 좋은 일 있을 거예요"라든가 “저에게 위로주 한잔 살 기회를 주세요"라든가 말이다. 그러나 그는 낄낄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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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같은 처지의 사람은 이처럼 예민해진다. 나는 그 친구한테 혹시 과거에 실수나, 마음에 상처를 준 일이 있는가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다.

이런 일은 있었다. 내가 홍콩특파원 시절 그는 태국 방콕 특파원이었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방콕에 거점을 두고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전역을 커버했다. 보통 각 나라마다 특파원이나 현지 통신원들이 있어 챙겼지만 중요한 일은 ‘형님’격인 방콕특파원이 직접 날아와 챙기기도 했다. 

반면 한국은 아시아 취재에 허술한 편이었다. 연합뉴스와 일부 방송사를 제외하고서는 일본, 중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 특파원을 거의 파견하지 않았다. 

나는 홍콩에 적을 두고 동남아시아는 물론 서남아시아까지 내 사정거리에 두고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사실 내가 아시아 각국을 커버하지 않아도 됐다. 본사 국제부에서 외국 언론과 통신을 정리해 직접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타고난 근질근질함이 나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나는 사건이 터지면 터지는 대로 달려갔고, 사건이 없으면 기획거리를 잡아 아시아 전역을 훑었다. 취재 자체가 재미있는 여행이자 탐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시아 전역에 금융위기가 터져 힘든 1990년대 후반, 동남아 각국을 돌며 정상(頂上)들과 단독인터뷰를 했다. 당시는 마침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식이 열리던 때였다. 나는 ‘건국 50주년 특집, 아시아 정상과의 대화’란 타이틀로 인도네시아,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정상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보도했다.

때는 1998년 8월13일 오전 9시.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총리 관저에서 훈센 총리와 인터뷰하기로 돼있었다. 박경태 주(駐)캄보디아 대사와 함께 관저에 들어서니 마이니치, 아사이, 요미우리, NHK 등 일본 4개 메이저언론사 방콕특파원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영역인 캄보디아에서 훈센 총리와 인터뷰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때 처음 그 일본 기자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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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인터뷰는 내가 판정승을 했다. 친한파 훈센 총리가 경제대국 일본의 4대 언론사 기자들을 기다리게 한 채 한국 기자와 먼저 인터뷰를 했다. 그것도 예정시간을 30분 넘어 한시간 20분간. 사실 인도차이나에서 홍콩특파원인 나는 손님격이었다. 나는 인도차이나 관련 기사에 대한 책임은 없다. 그러나 일본 신문들의 방콕특파원은 인도차이나가 자신들의 영역이었다. 보도도 그들 책임이었다. 자기 집 안방에 객(客)이 먼저 와 재미 본 격이었다.

그 일본 기자와 두 번 째 조우는 바로 그가 주재하고 있는 태국 방콕에서였다. 나는 그해 10월 방콕으로 날아가 추안 릭파이 태국 총리와 단독인터뷰를 했다. 이것 역시 현지 일본 기자들을 자극했다. 왜냐하면 일본 언론은 그 누구도 태국 총리와 단독인터뷰를 하지 못했다. 이유는 그들 특유의 묵계 내지 ‘단체행동’ 때문이었다. 

‘누구도 단독인터뷰를 안한다. 함께 한다’ 이것이 그들의 룰이었다. 일본 기자들은 서로 특종의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끼리끼리 몰려다녔다. 함께 기사를 쓰는 이른바 ‘패거리 저널리즘’에 익숙했다. 

그 일본 기자는 방콕 한 식당에서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한국 기자, 당신에게 두 번이나 졌습니다. 캄보디아는 우리 영역인데 선수를 당신에게 빼앗겼습니다. 방콕은 우리 안방인데 우리는 총리인터뷰를 단독으로 한 적이 없는데 홍콩에 있는 당신은 했습니다. 당신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우리가 반성할 점이 있습니다."

나는 그의 장중(?)하면서도 솔직한 고백에 감명받았다. 우리 같으면 그런 부끄러운 추억은 굳이 화제로 삼거나 떠올리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긍정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달랐다. 

‘일본인들은 역시 다르구나. 분명한 책임감과 승패관이 있구나.’

그가 서울특파원으로 부임한 이후 나는 반가왔고 몇 번의 술자리와 식사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묘한 방법으로 내게 펀치를 먹였다.

어쩌면 나의 민감한 성격, 심리 과잉상태의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같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이탈하고, 지금껏 살아온 삶의 궤적과 전혀 다를 수도 있는, 불확실한 미래와 맞서야 하는 사람에게는 사소한 일에도 자책감, 수치감 등이 들 수 있다. 

길거리에서 나를 못본 체하고 지나가는 이를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 내가 인생을 잘못 살은거지. 그러니까 모두 나를 외면하는 것이야’

이런 생각이야말로 극복하고 추방해야 할 부정적 생각이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들곤 했다.

보다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후배들의 태도였다.

사표를 낸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 근처 사우나를 찾아갔다. 거기서 나는 평소 잘아는 후배를 만났다. 그런데 그는 나를 못본척 했다. 좁은 탕과 사우나 내부 공간에서 그가 나를 못볼 리 없다. 그러나 그는 나를 외면한채  공간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목욕을 했다.

당시 나도 일부러 다가가 너스레를 떨 기운이 없었다. 왜 그는 나를 외면할까. 저 친구도 내게 평소 서운함이 있었는가. 내가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아니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 친구 마음에 상처를 남겼나. 그래서 나를 외면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한번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생각을 하는 것만큼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고 따지는 만큼 마음은 어두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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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를 지나도, 지하철을 타도, 잘가는 음식점이나 술집에서도 후배들과 마주친 적이 적지 않았다. 그 중 절반 정도는 나를 아는 척, 나머지 절반 정도는 나를 못본 척하는 것 같았다. 혹자는 왜 먼저 아는 척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나를 외면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에게 부러 다가가 말을 걸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아랫 사람 아닌가. 이래 저래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쩌면 대인기피증이 올 수도 있겠구나.

전화 반응도 갖가지다.

과거 전화 패턴은 대개 이랬다. 내가 전화할 경우

“여보세요. 저 ○○○입니다."

“아 반갑습니다. 부장님, 요즘 바쁘시죠"

상대방은 반색을 하고 받는다. 

보다 반갑게 받는 것은 휴대폰에 내 전화번화가 뜨는 것을 확인한 상태다.

내가 “여보세요. 저…"하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아이구 부장님, 반갑습니다"라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 전화는 이렇게 바뀌었다.

“안녕하세요. 저 ○○신문에 있던 한강입니다."

“예…" 그리고 침묵…. 

수고한다느니 안녕하셨나느니 등의 의례적 말도 없이 단답형 “예"로 끝난다. 이런 짧은 답변에는 어차피 나는 용건이 없고 당신이 용건이 있을테니 말해보시요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뻘쭘해지는 느낌이다. 어차피 내가 얘기해야 할 입장이다.

“예, 제가 최근 신문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이제 격무에서 벗어나 차분하게 글도 쓰고 내 세계도 갖고 싶어서…"

사실 무슨 청탁 전화도 아니었다. 평소 가깝게 생각했고 그래서 안부전화를 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쌀쌀한 답변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끄낼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상대방은 10초도 참지 못하고 내 말을 끊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지금 제가 중요한 손님과 대화중이라…, 다음에 말씀 나누기로 하죠. 네"

‘찰칵’ 전화를 끊는다. 그때 찾아드는 배반감(?)이 마음을 때린다. 그 감정은 곧 쓸쓸함과 회한(悔恨)으로 바뀐다.  

‘내가 고작 이런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왔는가. 무슨 돈을 꾸겠다는 것도, 부탁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 단순 안부 전화인데도…. '

 

그 상대방은 내가 난생 처음 언론상을 받았을 때 본인이 앞장서서 저녁을 산 사람이었다. 1999년 1월 수상식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기자 시절 초반부터 잘 아는 사이였지만 내가 외국에 나가 오래 있는 바람에 몇 년 만에 조우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좋은 날 내가 한잔 사겠다"고 했다. 당시 식장에는 직장 동료, 친구 등 수십명이 있었다. 가볍게 밥을 산다고 해도 꽤 비용이 들 판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그날 밥을 사야 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런데 본인이 자진해서 그러는 모습이 너무 감사했다.

그래서 우리는 퇴계로 대한극장 뒤 필동면옥으로 갔다. 냉면, 제육, 만두가 수준급이지만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은, 신문기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집이었다. 거기서 우리 수십명은 실컷 먹었다.    

그런 사이였는데 내가 신문사를 나온 후 걸은 첫 전화의 1분도 참기 어려워했다. 이후 두 번 다시 전화를 하지 않았지만.

사실 요즘 전화 통화할 때 상대방이 싸늘하거나 무미건조한 태도로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며칠 전인가 평소 친했던 고교선배에게 전화 했다. 내가 나온 이유를 설명하고 열심히 살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선배, 저 한강입니다."

“네"(짧게 대답한 뒤 침묵)

“책도 쓰고 글도 쓰려구 사무실 내고 일합니다."

“그렇지. 놀면 뭘해? 일해야지."

“예… 바쁘신가 보죠. 나중 연락드릴께요. 안녕히 계세요"

“…"

상대방은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전화를 받으면 “요즘 어때"라고 묻던가, “사무실 전화번호 좀 알려줘", “한번 만납시다"라는 의례적 대화가 있는 법인데 아주 사무적으로 싸늘하게 나를 대했다.

이런 태도는 유독 돈이 있거나 여유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샐러리맨 출신들은 대개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끼는 지 부드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부유한 이들은 정반대였다. 가진 사람의 일종의 방어적 심리인가. 미리 선을 긋고 넘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허지만 회사를 일찍 나온 것 자체가 무슨 죄라도 되는 양 쌀쌀맞고 훈계하는 듯한 태도에서는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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