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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연재| 2006 한국인 vs 일본인 (5)

일본인의 冷靜, 패전 후 권토중래

한국인의 熱情, 분위기 타면 무서우나…


김과장과 한기자는 퇴근 길에 다시 만났다. 한기자가 평소 가는 이태원 프랑스 식당에서다. 프랑스인들이 직접 운영하는 노천 카페다. 10월 중순이지만 해가 뉘엿뉘엿 진 후 날씨는 초가을 같았다.  

 “이 집 전통의 홍합 요리 한 접시와, 포도주는 스페인 산 ‘또레스 그랑 코로나(Torres, Gran Coronas)’."

김과장은 과거 앉은 자리에서 독한 위스키 한 병을 거뜬히 비우던 한기자가 ‘우아한’ 와인 매니아로 변신한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선배. 와인은 왕년에 작업할 때나 마시던 술 아니요? 도대체 두주불사 선배께서 왜 와인을 좋아하시게 됐나."

“위스키는 강렬하지. 그것은 대화를 위한 술이 아니라 잊기 위한 술이야. 스트레스나 불유쾌한 추억 등등을 알코올로 털어내기 위한 것이지. 그러나 와인은 대화를 위한 술이지. 편안한 상태에서 속의 생각을 음미하고 반추하게 되며 자연 상대방과 교감을 할 수 있게 된다네."

한기자가 와인 예찬론을 펼치고 있는 사이 김이 무럭무럭 나는, 토마토 소스에 매콤한 맛의 홍합 요리가 냄비 채 나왔다. 

“자, 홍합 요리를 위해 한 잔!"

‘쨍그렁’ 

경쾌한 금속음 소리의 여운을 음미하면서 김과장은 포도주 한 모금을 마셨다. 생각보다 강한 탄닌향에 묵직한 맛이 괜찮았다. 한기자가 다시 얘기를 꺼내 나갔다.

“일본인들은 패전 후 순한 양이 되고 말았지. 마치 거세된 사내 같다고 할까. 과거의 그 불굴의 투지, 저항 정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은 온데 간데 없고, 항상 뜻도 미적지근하고 정면 대결을 피해가는 스타일로 바뀌었지. 그래서 요즘 일본의 우익들은 겉으로는 한국을 열등하다고 비웃으면서도 속으로는 ‘한국인들의 저 터프함을 본받자’고 생각하고 있다네."

“그럴 법도 하네요." 

김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축구선수 최용수 기억하지?"

김과장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한기자는 그의 스토리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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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선수/ 스포츠조선DB

 

1999년 영국 진출이 무산되면서 최용수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심신을 다 잡고 최선을 다해 2000년 14골로 K리그 최우수선수에 올랐다. 바로 그 성적 때문에 이듬해 일본에 진출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경위는 달랐다. 당시 일본 이치하라 구단은 최용수가 아닌 다른 한국 선수에게 관심이 있어 2000년 가을 K리그를 찾았다. 

어느 날 안양 경기에서 최용수는 후반 25분 교체됐다. 최용수는 웃통을 벗어 던지고 벽을 걷어차더니 머리카락을 잡아 뜯었다. 그 모습을 본 일본 구단 고위 관계자는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저런 파이터가 필요하다. 당장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최용수는 이렇게 전했다.

“(그 분은) 분한 걸 참지 못하는 내 성질이 마음에 들었대요. 일본엔 그런 선수가 없다나요?" 

최용수는 이후 일본서 5년 동안 75골을 넣었다.  

한기자는 말을 계속 했다.

“한국인은 확 끓어오르고 확 식는 경향이 있지. 냄비근성이야. 혹자들은 냄비근성을 나쁘게 평하지만 나는 다른 생각이야. 안 좋은 면보다 좋은 면이 더 많다는 뜻이지. 우리가 1997년 IMF위기를 겪게 된 것도 냄비근성이지만 극복한 것도 냄비근성 덕분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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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금모으기 운동에 참여하는 한국인들/중앙포토

 

당시 김영삼 정권은 세계화 정책에 따라 과감하게 금융시장 등을 개방했다. 대문을 연 것은 좋았으나 빗장, 초인종, 현관문, 안방 문, 금고 열쇠 등 세부 사항 등의 점검이 미흡했다. 한국 금융기관들이나 대기업은 싼 외국 이자에 혹해 너도나도 외국 돈을 빌려 쓰면서 팽창 일로의 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다가 그 해 7월 터진 동남아 금융위기가 일파만파로 번져 한국도 11월 IMF(국제통화기금)에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말았다.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지. 한국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두 주먹 불끈 쥐고 일어선 각오는 대단했어. 그 중에서도 압권은 ‘금 모으기 운동’이었지. 불과 2개월만에 총 349만명이 참가해 21억달러에 달하는 금 225톤을 모았다네. 이 운동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어. 개인주의가 팽배한 서구에서는 경제 위기가 닥치면 각자 살 방도를 찾는 것이 상례인데 한국에선 정 반대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지.

바로 이런 정신과 분위기 덕분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기업 구조조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고 우리는 IMF 빚을 예정보다 3년 앞당긴 2001년에 다 갚을 수 있었어."

긴 이야기에 목이 타는 지 한기자는 포도주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얘기를 계속했다.

“한국인들에게는 그런 폭발적 에너지가 있어. 분위기 타면 무서운 기질 말이야. 잘만 이끌면 엄청난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

김과장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한국인들은 한다면 하는 사람들이죠. 화장실 문화도 그래요. 깨끗한 화장실 하면  일본을 연상했는데 이제 한국이 먼저 꼽힙디다. 불과 몇 년 새 한국인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더니 확 바꿔 버렸죠. 반대로 작년 도쿄 신주쿠 어느 전철 화장실에 들렀는데 어찌나 지저분하던지…."

“바로 그걸세. 우리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어땠는가. 한번 분위기 타니까 무섭더군. 히딩크 휘하의 한국 축구팀이 폴란드에 이어 포르투갈, 이태리, 스페인 등 세계의 강호들을 차례로 격파하면서 한국 100년 축구 역사상 최초로 세계 4강까지 올랐어. 당시 태극전사였던 홍명보, 황선홍, 안정환,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이천수, 이을룡, 김남일, 송종국, 최진철, 이운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다시 뛰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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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월드컵/ 스포츠서울DB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중단하고 4년 전 그때 그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대-한??국’ 소리가 귓전을 울리며 와인의 나른한 기운과 어울려 마음 속에는 유쾌한 감정이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이제 해는 완전히 졌다. 대신 휘황한 네온사인과 가로등 아래 이태원 거리는 활기와 이국적 풍경으로 들떠 있었다.

한기자가 이야기 가닥을 추렸다. 

“일본인들이 싸우지 않으려는 용기가 있다면, 한국인들은 싸울 줄 아는 용기가 있다네. 어젯밤 일에 자네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 상대방이 분명 잘못을 했고 자네는 이를 제지하다 문제가 발생한 것뿐이야. 그렇다고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잖나.

일본인들이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쿨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냉정(冷靜)이 있다면, 한국은 현실을 끊임없이 바꾸고 발전된 상태로 만들려는 열정(熱情)이 있다네. 21세기는 변화와 혁신의 시대야. 과연 열정과 냉정 중 어떤 성격이 더 21세기에 맞을까?"

말을 끊고 김과장을 잠시 바라 본 한기자가 다시 이야기했다.

“일본은 소득이 높아졌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현상 유지적 사고에 젖어 있다네. 특히 책임감이나 의무감을 갖고 대외적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걸 아주 싫어하지. 되려 일본인은 태평양 전쟁때 서양 국가들과 싸워 아시아의 탈식민지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고 있지. 그런 생각에 빠져 있으니 야스쿠니니 뭐니 늘 그런 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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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종전 기념일에 맞춰 야스쿠니 신사를 찾은 일본 시민들/로이터 연합뉴스

 

김과장은 몇 년 전 일본인 스스로 일본을 비판한 글을 기억해 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내 생각에 일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경제대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온 국민이 열심히 노력하던 시절은 지났다. 이미 그 목표가 달성되어 버리고 난 지금은 무엇을 향해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채 나라 전체가 극심한 무력증에 빠진 느낌이다.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것처럼 더 무서운 저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김과장의 빈 잔에 와인을 채워주던 한기자가 김과장의 얼굴을 유심히 보면서 물었다.

“어때 내 판단에 동의하는 것인가?"

“그럼요. 한선배 의견은 탁견입니다. 더불어 내 자신 속에 불끈 불끈 치솟는 열정이랄까 지랄 맞은 성질이랄까, 이것도 잘 활용하면 좋은 발전적 에너지로 쓰일 수 있다는 뜻이겠죠."

김과장의 이야기에 한기자는 함박 웃음을 터뜨리면서 손뼉을 쳤다. 

“바로 그거야. 자네가 회사 상사나 조직문화, 나아가 이 사회에 대해 품고 있는 온갖 불만, 모순, 비관, 절망, 낙관, 희망 등 용솟음치는 응어리가 바로 변화와 열정을 바라는 자네의 에너지일세. 그 에너지를 다루는 주인이 바로 자네지. 자네가 잘 다루면 그것은 ‘분위기 타면 확 세상을 바꿔버리는’ 긍정적 에너지로 바뀔 걸세. 그러나 잘못 다룬다면 ‘성질 나면 물불 안 가리는’ 파괴적 힘이 되고 말겠지."

그때 김과장이 맞장구 쳤다.

“맞습니다. 맞고요."

한기자가 순간 의아한 눈초리로 김과장을 쳐다봤다.

“어디서 많이 듣던 경상도식 화법인데?…누가 그러더라…. 하여간 에너지의 선순환, 그 문제를 사회 전체로 확대 해석하면 결국 리더십에 귀착된다네. 히딩크의 성공은 변방 한국 축구팀이 가진 잠재력을 알아보고 이를 집중 계발해 성과로 연결시킨 점이라네. 한강의 기적을 성취하는데 일조한 박정희, 김대중,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김우중, 이건희 같은 이들은 한국인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긍정적 에너지로 몰고 간 리더십의 달인들이지. 

반면 세계를 상대로 깡패 노릇과 핵 장난을 하는 북한, 그리고 굴욕적인 망국을 가져다 준 우리 구한말 리더십을 보게. 똑 같은 한민족인데 왜 그렇게 다르게 살고 있는가. 한 마디로 한국인이 내재한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파괴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일세!"  <계속> 

글ㅣ 함영준
22년간 신문 기자로 일했다. 스스로 신문사를 그만둔 뒤 글을 썼고 이후 청와대 비서관 등 공직 생활도 지냈다. 평소 인간의 본성, 마음, 심리학, 뇌과학, 명상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마음건강 종합 온라인매체인 마음건강 ‘길’(mindgil.com)을 2019년 창간해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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