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자유가 없던 시절
내가 입사하던 1980년대 초 언론산업은 호황기였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신문 발행부수는 날로 늘어났다. 월급도 대기업보다 많았다. 전국지는 조·석간 합쳐 6개뿐. 이밖에 통신사 1개, 지상파 TV 2개, 군소 신문 서너개가 있을 뿐이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포함해 수백 개 언론사가 난립하는 시절과는 달랐다.
나름 자부심도 높았고 회사 분위기도 좋았다. 200명 가까운 기자가 매일 12면을 제작하니 정성도 대단했다. 저녁 7시쯤 퇴근하면 단골 음식점으로 몰려가 소주잔을 나누면서 격의 없는 토론을 벌이며 회포를 풀곤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언론의 자유가 없다는 점이었다.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는 보도되지 못했고 담당 기자나 간부는 기관에 끌려가 ‘봉변’을 당했다.
신문 가판, 즉 초판이 나오면 오후 7시쯤부터 각 부처 대변인이나 정부 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 기사를 빼달라, 저 기사를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것이 통하지 않으면 문화공보부나 안기부(현 국정원), 청와대까지 나서서 신문사 간부나 임원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서슬 시퍼런 상황이라서 정치ㆍ사회 등 정권과 관련된 기사를 쓸 경우에는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 당시 기자들은 초년병 시절부터 사실(fact)과 의견(opinion)을 명확히 구분해 쓸 것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예컨대 ‘화창한 날씨’는 객관적 사실이지만 ‘상쾌한 날씨’는 주관적 의견이다. ‘그 여자가 미인대회서 1등을 했다’는 표현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은 ‘의견’이다.
군사 독재 하에서 우리는 의견은 줄이고, 사실만 보도할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마저도 문제될 수 있었다. 보도됨으로써 정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된다면 해당 기사를 쓴 기자는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예컨대 정부와 상의 없이 고위 공직자가 연루된 수뢰사건을 크게 보도하거나, 부정부패 캠페인 시리즈를 내보내 정부의 심기를 건드릴 경우가 그렇다. 부동산 사기 피해자 중에 현직 ‘장군 부인’이 포함된 기사가 나갔다고 보안사(현 기무사) 사복 군인들이 신문사 편집국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국의 검열을 피해 국민에게 사실과 정보를 알려주려면 기자들이 ‘언어의 마술사’가 돼야 했다. 형용사·부사는 물론 조사까지도 의미를 담아 선택했다. 민감한 상황을 보도할 때 선배들은 흔히 이렇게 주문했다.
“사설 쓰듯 하지 말고 스케치하듯 보여줘."
쉽게 말해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 Show, Don’t tell.’이다. 기자가 심판자가 돼 상황을 말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대로 묘사해주고, 독자가 알아서 판단하게끔 만들라는 주문이었다.
이런 기사 중 압권은 1984년 11월 30일자 <조선일보>에 나온 ‘거리의 편집자들’이었다. “낮 12시쯤의 광화문 지하도는 점심 먹으러 가는 사람, 먹고 나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붐빈다."로 시작되는 이 칼럼은 서슬 시퍼런 검열 하에서 신문 가판원들이 톱기사는 무시한 채 1단짜리 ‘시국 관련 뉴스’에 빨간 줄을 그어 파는 모습을 소개하면서 당시 암울했던 언론 상황을 자조한 것이었다. 이 칼럼은 5공 당시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필자는 결국 정권의 압력으로 2년 뒤 외유를 떠나야만 했다.
오십 넘어 사건기자로 취재현장에
김훈의 글을 접한 것이 그 무렵이었다.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였던 그는 ‘문학기행-명작의 무대’를 연재하고 있었다. 특유의 유려한 문체와 풍부한 감성, 현란한 수식어로 꽉 찬 그의 글은 매일 시국 사건과 검열 속에서 짧고 무미건조한 기사를 써야 하는 내 입장에선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같이 느껴졌다.
그는 기자라기보다 대문장가 같았다. 글은 사실을 바탕으로 전개되나 항상 그의 의견(주관적 감정·판단)이 넘실대고 있었다. 1986년 5월 18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그의 글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김승옥의 산문은 바다 또는 바다에 연한 소도시에 관하여 서술할 때 가장 명석한 아름다움에 도달한다. 김승옥의 바다는, 때로는 카뮈의 에세이들이 그려내는 알제리의 바다처럼, 생의 작렬감에 가득 찬 바다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도시(현실)와의 불화의 관계 위에 설정된 자폐의 공간이다….
질식할 듯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도 문학을 주제로 한 그의 글은 비교적 자유롭게 숨을 쉬었고 원초적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도 정권의 촉각을 곤두세울 만한 ‘불온한’ 생각은 영리하게 피해 기술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