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 민주화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대한항공(KAL) 858 여객기가 공중 폭발해 탑승자 280여 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듬해 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첨예한 남북대결이 시작됐다. 뉴욕 특파원이었던 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우리 정부는 북한공작원 김현희를 체포해 북한 소행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박길연 유엔대사는 한 해 전(1987년) 일어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민주화 탄압 사례를 거론하면서 우리 측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얼마 전 남조선 스파이 집단 두목을 지낸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이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1973년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폭로했다."
내용이 왜곡된 ‘이후락 증언’의 충격파는 컸다. 서방국 대표단들의 표정도 곤혹스럽게 변했다. 마침내 박길연의 주장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여러분, 그 김대중을 죽이려던 괴수 박정희는 또 어떻게 됐나? 자기 부인은 동족의 손에 잃었고, 자신도 자기 오른 팔인 김재규 중정 두목 손에 암살되지 않았는가."
하도 한국 쪽의 아픈 데만 건드리는 통에, 어느새 사건의 본질은 희석되고 말았다.
사실 북한 박길연이 인용한 월간조선의 이후락 인터뷰는 조갑제가 아니라 오효진 기자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 측이 이를 조갑제 기자로 안 것은 당시 월간조선의 특종이나 폭로기사 상당 부분이 조갑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조갑제 기자는 그 시절 최고의 취재력을 과시하던 대한민국 ‘대표’ 기자였다. 박정희의 유신은 물론 5공 군부독재 정권의 실상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히로뽕-코리언 커넥션’,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부마사태와 10·26 사건의 내막’, ‘국가안전기획부’, ‘한국 내 미 CIA의 내막’, ‘주한 유엔군 사령부’, ‘전두환의 금맥과 인맥’,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등등….

뉴욕에서 돌아온 이듬해(1989년) 국방부를 담당하게 된 나는 판문점 군사정전 회담을 취재하러 갔다. 북한 기자단 대표인 민주조선 김상현 기자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판문점을 출입해 한국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내 집이 “개포동"이라고 했더니 “땅값 좀 올랐겠구먼"이라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때 북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조선 사람이 바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였다. 북한 기자들은 그와 같은 신문사에 근무하는 나를 볼 때마다 우르르 몰려와 근황에 대해 물었다.(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오는 진풍경이다.)
“조갑제,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기사 쓸 수 있지?"
“거 ‘남산’(지금의 국정원이며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 아이들이 가만 놔두나?"
“미 8군이니 CIA니 다 까발렸던데 양키들이 항의 안 해?"
내가 “우리 이제 민주화되고 있잖아. 남산이 함부로 하던 시절은 지나갔어"라고 말해주면 북한 기자들은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당부했다.
“조갑제 최고야. 안부 좀 전해줘…."
북한 기자의 ‘큰 형님’격인 김상현은 나를 따로 불러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함 기자, 스파이(남파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한 명이 더 나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