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4000억원이 시중은행에 100억원짜리 40개 계좌로 분산 예치돼 있다."
1995년 10월19일 박계동(민주당) 의원의 폭탄 발언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어졌다. 신한은행 서소문 지점의 차명계좌 3개가 증거로 제시됐다.
연희동 노 전 대통령 측은 처음에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계좌는 없다. 박계동이 헛다리를 짚었다." 유엔(UN) 참석차 미국에 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그 말을 듣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지시를 내렸다. “그래? 그렇다면 검찰보고 수사하라고 해."

그러나 박 의원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10월 21일 노 전 대통령과 이현우 전 경호실장, 서동권 전 안기부장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비자금 통장 가방을 열어보니 문제의 신한은행 통장이 나왔다. 비자금 담당 직원의 실수였다. 모두들 아연실색했다. 이튿날 이현우씨는 검찰에 자진 출두해 사실을 인정했다. 이제 칼은 YS에게 넘어갔다. 불과 3개월 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12·12와 5·18에 면죄부를 주었는데….
YS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 이를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노태우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에 대해서도 전면 수사를 지시하는 한편 12·12와 5·18을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규정하고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에 돌입했다. 이후 1년반 동안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외교 등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됐다. 우리 경제가 막 1만 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는 시점에 온 국민의 에너지와 관심은 죄수복을 입은 두 전직 대통령에게 쏠렸다.
그러나 과연 이 일을 YS가 주도한다는 게 옳은 일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는 바로 3당 합당을 통해 사실상 전·노와 손잡고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아닌가. 더구나 그 역시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조만간 그에게도 부메랑이 닥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민주계 출신들 한보서 엄청난 정치자금
돌이켜보면 1993년 봄 YS 정권의 출발은 좋았다.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 정책으로 지지율이 90%나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독단적 국정 운영과 졸속 정책 추진으로 인해 2년 뒤 1995년 6월 지방선거에선 참패를 했다. 세간의 비판 핵심에는 YS의 차남 김현철이 있었다. 그가 사조직을 운영하며 국정에 개입하고 인사 농단을 부린다는 것이다.
1995년 8월 나는 ‘모래시계 검사’로 불리던 홍준표 검사를 만났다. 그는 대뜸 현철씨가 동창관계로 얽힌 사업가들로부터 돈을 얻어 쓰면서 후견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K고 동문인 W그룹 C회장, H그룹 P회장과, K대 동문인 J그룹 J회장, K그룹 후계자인 L씨 등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2년 뒤 IMF 사태를 전후해 도산했다.) 홍 검사는 특히 현철씨가 한보그룹과도 밀착돼 있다고 전했다. 한보그룹은 불과 4년 전(1991년) ‘수서 비리’사건으로 정태수 회장이 구속되는 등 큰 타격을 받았는데 최근 재기했다는 것이다.
얼마 뒤 나는 한보그룹이 PK 출신 민주계 세력들에게 엄청난 정치자금을 쏟아 붓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제로 민주계 좌장 S의원 수하 직원들이 운영하는 ‘컨설팅’ 회사를 찾아가보니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는 물론 사업자금까지 한보로부터 지원받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노 비자금’ 정국이라 취재가 무르익으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