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18일 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됐다. ‘외환 위기’가 절정인 상황에서 무엇보다 세계 여론의 반응이 궁금했다.
홍콩 특파원이던 나는 아침 일찍 완차이(灣仔) 사무실로 나갔다. 수북이 쌓인 신문 중에서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을 펼쳐들었다. 순간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개하고 있다’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통’ 돈 커크 기자는 “남아공 넬슨 만델라의 당선에 버금가는 쾌거"라며 극찬했다. 나는 안도했다. 다른 언론들도 호의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이자 고립무원(孤立無援) 상황이었다. IMF(국제통화기금) 사상 최고인 미화 5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지만 기업 도산은 가속화되고 외환· 증권시장은 붕괴 직전이었다. 그러나 우방인 미국과 일본은 철저히 방관했다. 김영삼 정권 말기 한·미 관계는 심각했다. 외국 언론들은 라틴 아메리카식의 국가부도(디폴트) 사태를 예견했다. 한국의 국가 신인도는 최악이었다.

인기 영합보다 정공법 택한 DJ
이런 상황 속에서 국제 여론이 DJ(김대중) 당선을 반겼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했다. DJ는 당선되자 마자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초 “IMF 재협상" 우려와 달리 “외환위기는 우리 탓"이라며 책임을 인정했다. 사실상 면접 심사 차 온 데이비드 립튼 미 재무차관에게 “IMF 구제조건을 성실히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외신은 환영했다. 심지어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 언제 파산할지 모르겠다"는 DJ의 실수성 발언에도 “한국이 드디어 진실을 말한다"며 호평했다.

마침내 꿈쩍 않던 미국이 움직였다. 12월 25일 0시(미국 시간 24일 오전 11시), 서방 13개국이 우선 연말까지 받아야 할 빚(단기채무)을 이듬해로 연기해주고, 추가로 100억 달러를 조기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클린턴 정부가 한국에 주는 성탄절 선물이었다. 한국 경제의 수직 낙하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지만 IMF 후폭풍이 본격화되면서 1960년대 이후 처음으로 실직자가 쏟아져 나왔고 서울역 등지에 노숙자들이 넘쳐났다. 곧 노사갈등이 전쟁처럼 불거질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한 DJ는 한국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대우그룹이 공중 분해되고 현대·삼성그룹의 일부도 쪼개졌으며, 부실 금융기관 정리가 무자비하게 진행됐다.
사실 국민들은 승승장구하던 우리 경제의 몰락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DJ는 인기 영합보다 정공법을 택했다. 국민들에게 고통 분담과 애국심을 호소했다. 국민들은 감내했다. 압권은 ‘나라를 살립시다, 금을 모읍시다’라며 전개된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이런 노력들 덕분에 한국은 당초보다 3년 앞당긴 2001년 8월, IMF를 졸업했다.
돌이켜 보면 6·25 이후 최대 국난(國亂)이던 위험천만한 시기에 DJ의 리더십은 탁월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것은 국민에게 끌려가지 않고, 국민을 끌고 갔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