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말 찾아온 외환위기는 우리가 우물 안 개구리임을 실감나게 했다. 글로벌 시대 선진국이 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너도나도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더구나 대학가에는 반미·자주 분위기도 상존해 있었다.
2004년 봄 내가 몸담은 신문사 편집국과 고려대 주요 보직교수들과의 회식이 서울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열렸다. 모두의 시선이 어윤대 총장이 들고 온 와인에 쏠렸다. ‘어, 막걸리대 총장이 웬 와인을….’

어 총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희는 조국을 등지고 민족을 버렸습니다."
평소 ‘민족 대학’임을 강조하는 고대 총장의 말치고는 의외였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약소국 시절 ‘민족’은 좋은 의미였지만,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편협한 개념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 대학들도 세계를 무대로 경쟁하려면 국내적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와인이 상징하는 글로벌화와 품격을 저희 대학에 접목시키려고 합니다."
이 말에 모두 머리를 끄덕였다. 어 총장은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 삼성이 소니를 제치고 세계 최고 기업이 됐듯이, 앞으로 한국 대학 중에서도 예일이나 케임브리지 같은 명문대학이 반드시 나올 겁니다."
그 말에 모두 박수를 쳤다.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민족’을 넘어 ‘글로벌’을 위하여 건배!"
대학 총장이 보직 교수들을 이끌고 언론사 실무 간부진과 만나 격의 없는 태도로 이해와 설득을 구하는 모습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다. 그런 식으로 어 총장은 언론을 우호세력으로 만들어 나갔다.
“국문과도 외국인 교수 뽑아라"
2003년 2월 제 15대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한 어윤대는 세 가지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전통과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집시다."
“내부 지향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진취적 민족주의로 나갑시다."
“교육과정, 내용, 시설 모든 것을 세계 최고로 만듭시다."
이 말은 사실 우리 대학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내로라하는 우리 명문 대학들은 그동안 양적(量的) 성장에 비해 질적(質的)으로 낙후돼 있었고 국제 경쟁력은 형편없었다. 세계 100위권은 물론, 아시아에서조차 10위권 밖으로 밀려 나 있었다.
어윤대가 내건 캐치프레이어즈는 ‘글로벌 고대 계획(Global KU Project)’이었다.
교육·연구·시스템·인프라·의식 등 모든 것을 세계 수준에 맞게 혁명적으로 바꿔 2010년 세계 100대 대학으로 진입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국제화가 필수적이었다.
우선 담당 처장을 비롯한 직원들을 하버드·예일·스탠퍼드 등 미국 유명대학에 벤치마킹을 보냈다. 현황조사와 현장 답사를 원칙으로 했다. 분석결과 나온 해답은 첫째 영어(원어) 강의 확대, 둘째 해외거점 대학 구축, 셋째 국제하계대학 육성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