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1979년 발행부수 100만부를 돌파했고 5년 뒤 1984년 150만부를 돌파했다. 과거 1등이었던 <동아일보>를 제치고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1983년 11월 <조선일보>에 입사한 나는 사내 분위기에 놀랐다. 편집국 각 부서에서 서로 술을 사겠다고 나설 만큼 인심과 여유가 풍족했다. 선배들은 늦게까지 남아 일했고, 판(版) 갈이는 밤새 계속됐다. 일에 있어서 대충은 없었다. 오후 7시쯤 퇴근하고서도 기사를 고쳐 쓰기 위해 불려 들어간 적이 비일비재했다.
<조선일보>는 사주(社主)가 이북에서 내려와 반공 기조가 유독 강했다. 보수적이었으며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반면 1970년대 유신 시절에 대학생활을 한 젊은 기자들은 대부분 박정희를 싫어했다. 더구나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은 언론에 시시콜콜 간섭하려고 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경영진, 즉 사주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조선일보> 사주는 고(故) 방일영, 방우영 형제였다. 방일영 회장은 신문사 운영을 일찌감치 동생인 방우영 사장에게 맡기고 물러나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방우영 사장은 군부 독재 세력을 노련하게 다루며 신문을 정상(頂上)으로 올려놓는 경영술을 발휘했지만, 젊은 기자들의 눈에는 그런 그가 좋게 보일 리 없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 물결이 일면서 <조선일보> 기자들도 노조를 만들어 경영진을 압박했다. 그때 젊은 기자들은 방 사장을 ‘독재정권에 협조한 사주’로 보았고 노조는 ‘사원 지주제(持株制)’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측은 경영권을 노조가 나눠 갖자는 의도로 보고 거부했다.
급기야 노조는 파업을 모의했다. 나는 노조 1, 2대 조직부장으로, 노조 결성 당시 문선·정판·운전·발송·운수부 등 신문사 ‘블루 컬러’ 노동자들을 일일이 설득해 노조에 가입시켰다. 그런 만큼 이들에 대한 내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었다.
회사 창립 70주년이 되는 잔칫날(1990년 3월 5일)을 며칠 앞두고, 우리는 <조선일보>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파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노조의 무리한 행보 때문에 파업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사주 측에서 보면 노조 핵심부는 용서하기 어려운 행동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노조위원장을 제외하고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파업 주도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던 내게는 신문에서 잡지로 근무처를 옮기는 좌천성 인사 정도로 일단락 됐다.
이런 회사의 화합 모드에는 방 사장 등 당시 경영진의 포용력과 이해가 크게 작용했다. 방 사장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기자들은 자존심을 먹고 사는 직업이라 한 번 명분을 내걸면 후퇴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런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투쟁을 하면서도 회사의 앞날을 생각하는 진지한 고민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997년, 나는 홍콩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공교롭게도 홍콩은 사주 일가가 자주 드나드는 곳으로, 다른 지역 특파원과 다르게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방우영 회장 일행이 들렀다. 난감했다. 파업 후 7년 가까이 거의 마주친 적 없던 분이다. 그는 1993년 사장직을 조카인 방상훈 전무(방일영 고문의 장남)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회장으로 일선으로 물러나 있을 때였다.
방 회장 일행이 며칠 머문 뒤 서울로 돌아갈 무렵 일행 중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아니, 회장님이 함특(함 특파원의 준말)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하시나봐? 무슨 이유가 있소?" 나는 옛날 파업 상황을 떠올렸다. 그가 그때 나를 잊을 리 없다. 나는 멋쩍은 표정만 지었다.
이후 방 회장은 1년에 서너 차례씩 홍콩에 왔다. 나는 방 회장이 나를 마뜩치 않게 생각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방 회장이 나를 회사 직원이 아니라 언론인으로 대우한다는 것이었다. 외국에서 고생하는 기자에게 배려를 하겠다는 마음이 보였다.
어쩌다 함께 온 일행의 짐을 내가 들어주면 그 짐 주인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침에 일찍 호텔에 와 로비에 앉아 있으면 이렇게 말했다. “가서 일봐야지. 여기 왜 와 있어.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서 일 하라우. 내가 부를 때만 오면 돼." 식사를 할 때도 나를 말석이 아니라 일행과 동등하게 대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방 회장과 나는 서서히 가까워져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