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규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젊은 시절 방 사장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논설위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한 번은 등산을 갔는데 비가 왔다. 방 사장은 자신이 입고 있던 윈드 재킷을 벗어 고참 논설위원에게 입혀주었다. “감기 걸리면 안 되십니다." 하산 길에 비가 그치고 해가 났다. 논설위원이 입고 있던 윈드 재킷을 벗어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자 방 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에이, 그거 입던 건데 그냥 입으세요. 저보다 더 잘 어울리시던데요." 그러자 그 논설위원도 부담 없이 걸치고 그냥 돌아갔다. 속으로는 횡재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흔하지만 40여 년 전 만해도 윈드 재킷은 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방 사장의 이런 행동은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다. 이규태 위원은 신문사 다른 사람들과의 등산 모임에서도 방 사장이 이와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 감복했다.
“신문 기자들이 자존심이 세잖아. 젊은 사장이 마치 하사하는 식으로 물건을 준다면 좀 언짢아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자신이 입던 것처럼 꾸미고 평소에 좋게 생각하던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는 방식을 택한거지. 또 당시만 해도 물자가 귀해 모두에게 나눠줄 수도 없는 형편이니까,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성의를 나타낸 거지. 방 사장에게 그런 깊은 구석이 있더라고."
1970년대 들어 방우영의 경영은 더욱 진가를 발휘했다. 국내 신문 사상 최초로 컬러 인쇄기를 도입, 흑백에서 컬러신문으로 변화를 꾀했다. 또한 당시는 외국 여행을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방우영은 ‘신문에 세계를 넣어라’라는 모토를 걸고 미주, 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등지에 기자를 보내 특집 기사를 만들어 연재하게 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양김이 차기 대통령을 놓고 대결 국면에 들어갔을 때, 방 회장은 인간적으로 김대중(DJ)보다 김영삼(YS)과 더 가까운 편이었다. 그로 인해 DJ와는 섭섭한 관계가 됐다. 1989년 <조선일보>와 DJ 평민당 간에 불거진 ‘조·평 사태’가 단적인 예였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YS 정권이 추락하고 DJ가 정권을 잡으면서 우리나라 정치지형도 바뀌기 시작했고, 언론계도 변화를 겪었다. <조선일보>는 부수나 영향력에서 1등 신문이기는 했으나 새 정부 하에서 이른바 ‘진보’ 등 여러 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기 시작했다.
정권의 언론 탄압과 길들이기를 수십 년간 겪은 방 회장으로서는 김 대통령이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운운한 발언을 듣고 향후 언론 탄압이 닥쳐올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아차렸다. 결국 걱정은 현실이 됐다. 2001년 1월 말 국세청은 중앙 언론사 23개 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5월 말, 갑자기 회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당장 들어와. 당신 사회부장이야."
깜짝 놀랐다. 외국에 오래 나가 있던 나를 갑자기 핵심 보직에 앉히다니…. 김대중 정권이 세무조사를 빌미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겨냥해 전면전을 선포하자 신문사는 이에 대항한 ‘방탄’ 편집국 체제를 만들었다. 나를 적극 천거한 이가 방 회장이었다.
그로부터 3년 반 뒤에 나는 <조선일보>를 나왔다. 신문사에서 내게 기자직보다 사업국에서 일해주길 원해 사표를 냈다. 입사한 지 21년 3개월 만이었다. 작별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을 때 방우영 회장의 첫 반응을 잊을 수 없다.
“뭐해서 먹고 살려고?" 80세에 가까운 고령인데도 이북식 억양이 섞인 큰 소리로 말했다. “당신 사업국이 싫다며, 글 쓴다구? 그래, 함 부장은 글쟁이야. 아버지도 그랬잖아. <조선일보>에 글 쓰라구. <월간 조선>, <주간 조선>에도 쓰고. 돕고 살자고.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방우영은 내가 초년병 기자 시절 막연히 알던, 권세에 아첨하거나 기자들을 억누르고 자기 마음대로 군림하는 사주가 아니었다. 이 풍진 세상에서 권력과 금력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1등 신문을 만들려고 노력한 신문인이었다. 물론 그도 약점이 있고 허물도 있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그런 것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내가 보는 그의 리더십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편집국뿐 아니라 배달·발송·공무·광고 등 모든 현장에서 사원들과 뒹굴며 상황을 파악하고 경영에 반영하는 ‘밑바닥 체질’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인재를 알아보고 발탁해 믿고 맡기는 용병술이었다. 그는 일반 기자 인사를 할 때도 편집국장에게 맡겼으며, 자신이 직접 관여하거나 독단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런 이면에는 소탈하고 솔직한 성품과, 함께 웃고 울 줄 아는 ‘인간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90세를 바라보던 방우영은 귀도 잘 안 들리고 몸도 그리 편치 못했다. 그러나 기개는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여전히 시국을 걱정하고, 신문을 생각하고, 기자들과 어울리던 때를 그리워했다. 나는 방 회장을 가끔 찾아가 뵈었다. 그에게 뭘 부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찾아가고 싶고, 찾아갈 수 있는 어른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